커피에 빠진 대한민국


오늘 아침도 출근부에 도장을 찍듯 회사 앞 커피전문점에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들고 나왔다. 몇 해 전 네티즌 논쟁을 지켜보며 피식 웃었던 ‘된장녀’가 어느새 내 모습이 됐다.

월간지 ‘COFFEE’ 12월호는 2009년 한국 사회를 ‘커피에 빠진 대한민국’이라고 정리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불황에도 커피산업은 유독 가파르게 성장했다. 관세청은 지난해 10만t을 돌파한 커피 수입량이 올해 11만T(108억잔 분량, 약 3800억원)을 넘어서리라 예상한다. 어른 1명이 288잔씩 마실 양이다.


전국 126개 이마트 매장에서 올해 가장 많이 팔린 상품은 커피믹스다. 지난해 3위에서 쌀과 라면을 제치고 매출 1위에 올랐다. 쌀>라면>커피의 순위가 커피>라면>쌀로 바뀌었다.

커피전문점 시장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았다. 스타벅스가 매장 310개로 여전히 1위지만 한때 50%를 넘었던 점유율은 30%대로 낮아졌다. 할리스(매장 213개) 엔제리너스(211개) 커피빈(185개) 탐앤탐스(149개) 다비치커피(105개) 카페베네(100개) 등 대형 브랜드 11개가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스타벅스는 올 들어 한 달에 3개꼴로 매장을 늘렸다. 지난 5월 출범한 카페베네는 6개월 만에 100호점을 열었다. 대형 브랜드 커피전문점 매장을 모두 합하면 11월 말 현재 1392개다.

이쯤 되면 커피를 단순히 기호식품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왜 한국인은 ‘지금’ 커피에 빠진 걸까? 바리스타 인증 시험을 주관하는 한국커피교육협의회 이상주 사무국장은 국민소득과 커피의 함수관계로 설명한다. “커피는 적도 남북의 위도 25도 이내에서만 생산됩니다. 후진국에서 생산해 선진국이 소비하죠. 커피 열풍은 보통 1인당 국민소득(GNI)이 1만5000달러를 넘어설 때 급속히 확산된다고 합니다. 2만 달러에 올라서면 와인이고요.”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2004년 1만5000달러를 넘어섰다(1만5082달러). 그해 7월 서울 이태원에 스타벅스 100호점이 문을 열었다. 2만1695달러를 기록한 2007년엔 와인 수입액이 사상 처음 1억 달러를 돌파했다. 지난해부터 경기 침체로 감소한 1인당 국민소득은 올해 1만7100달러로 예상되고 있다. 마침 올 와인 수입액은 외환위기 이후 처음 감소했고, 커피 수입액은 사상 최고다. 와인은 조금 버겁지만 커피는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지점에 한국이 있다.

1652년 영국 런던에 첫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무역상 대니얼 에드워즈가 터키에서 데려온 시종 파스카 로제는 매일 아침 주인을 위해 커피를 끓였다. 친구들이 이를 신기해하자 에드워즈가 로제에게 아예 커피하우스를 차려준 것이다. 이후 50년 만에 런던 커피하우스는 8000여개로 폭증하며 신흥 자본가와 지식인이 정보를 나누는 아지트가 됐다. ‘스펙테이터’ 같은 근대적 신문이 만들어진 곳도, 정치인들이 당원 집회를 연 곳도 커피하우스였다. 세계 최대 보험사 로이드 역시 선원과 여행자를 상대하던 커피하우스에서 태동됐다.

17세기 런던 사람들에게 커피는 핑계였다. 바다 건너 온 이국적 문화에 자극 받으며 수다를 떨기 위해 커피하우스를 찾았다. 그 수다는 저널리즘을 낳고, 근대적 경제 시스템을 잉태하고, 왕과 귀족의 나라를 시민사회로 변화시켰다.

2009년 한국 커피전문점도 커피보다 문화를 판다. 무선 인터넷을 깔아 정보에 목마른 손님을 유인하고, 몇 시간씩 앉아 수다를 떨도록 유도한다. 300년 만에 한국에서 다시 펼쳐진 17세기 런던 커피하우스의 풍경이 지금 어떤 변화를 싹 틔우고 있는지 궁금하다.

태원준 특집기획부 차장
wjtae@kmib.co.kr

출처:국민일보[2009.12.09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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